전문가 칼럼

BIMP-EAGA의 새로운 발전 동력: 주변에서 중심으로

등록일 2022.09.30

이지혁 연구원

(한국수출입은행)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방해로 일시적인 휴면상태가 지속되고 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기업의 동남아 진출, 한류 열풍, 관광객과 유학생의 왕성한 교류 등으로 한국과 동남아의 심상적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한국은 대중국 무역의존도를 줄이고, 정치적으로 주변 강대국에 함몰된 외교의 다변화를 꾀하기 위한 대안으로 동남아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한국과 지역공동체인 아세안과의 협력, 한국과 아세안 개별 국가의 협력을 넘어 아세안의 소지역(subregion)’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예컨대 메콩(Mekong)강 유역국(태국·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베트남)과 한국은 2011년 한·메콩 외교장관 연례회의를 공식화했으며, 2019년에는 동 회의를 장관급에서 정상 간 회의로 격상시켰다.

 

·메콩 회담이 대륙부 동남아 지역을 포괄하는 소지역과 한국의 협력이라면, 그 대척점에는 BIMP-EAGA가 있다. 동남아를 잘 아는 사람에게도 다소 생소할 수 있는 BIMP-EAGA는 해양부 동남아를 구성하고 있는 브루나이(B), 인도네시아(I), 말레이시아(M), 필리핀(P)의 국경지대를 연결하는 동아세안성장지대(East ASEAN Growth Area)’를 일컫는 용어다. 한국 정부는 2020년 부산에서 개최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한·해양동남아 소지역 협력 구상의 일환으로 BIMP-EAGA와의 협력 계획을 수립하고 지금까지 두 차례의 고위관리회의를 개최했다.

 

아세안은 1990년대, 인접한 지역 간 경제협력을 증진하고 제도화된 협력 방안을 구축하기 위해 소지역주의 혹은 소다자주의 개념을 기초로 IMS-GT, IMT-GT, BIMP-EAGA, GMS 등을 고안했다. ‘성장지역(growth zone)’ 혹은 기하학적 은유(geometric metaphor)’인 삼각형(triangle), 사각형(quadrangles), 심지어 육각형(hexagon)이 해당 지역(area)과 결합해 새로운 소지역이 형성되었다. ADB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고안된 소지역의 이론적 배경은 국경을 초월한 인접 지역에서 상호보완적 요소부존의 동원(the mobilization of complementary factor-endowment)’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서로 부족한 자원을 국경선 너머의 인접 지역에서 조달받음으로써 국경을 가로지르는 통합 경제권이 생성되며, 이는 동 지역에서의 인프라 건설, 제도 구축, 민간 자본 투자로 이어지는 기반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론상 외부의 간섭이 없고 경제적 상호보완 관계가 형성된 지역이라면, 경제적 원리에 의해 자연적으로 소지역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에는 큰 괴리가 있다. 아세안의 경험을 토대로 살펴보면, 대체로 시장 원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지역이 형성되기보다는 해당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적 선언과 중앙정부의 의지로 소지역의 명맥이 이어진 측면이 크다. 특히 BIMP-EAGA는 아세안의 다른 소지역과 비교해서도 발전이 더딘 지역이다. 1994년 공식 출범한 BIMP-EAGA는 브루나이 전체와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 북술라웨시, 말루쿠, 파푸아, 말레이시아의 사라, 사라왁, 라부안, 그리고 필리핀의 민다나오, 팔라완을 포함한다. 브루나이를 제외하면 BIMP-EAGA 지역은 모두 개별 국가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소위 소외된 지역의 연합체(an association of neglected regions)’라고 불릴 정도로 낙후되었다.

 

BIMP-EAGA를 구성하는 지역들은 서로 인접해 있지만, 기실 군도와 밀림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낙후된 인프라로 인해 물리적 거리보다 현실적인 이동 거리가 훨씬 더 멀다. 게다가 이웃 국가들 사이에서 흔히 존재하는 영유권 분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경제적 상호보완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운 절대적 낙후지역이라 지역 간 교류가 많지 않다. 인프라 사업도 중앙정부의 정치적 결단과 재정적 지원 없이 지방정부 주도로 추진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BIMP-EAGA가 지난 30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정적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중심에서 떨어진 외곽 지역의 사회경제적 낙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설립된 BIMP-EAGA1994년 출범 후 아시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지만, 2003년 첫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로드맵, 청사진, 비전 등을 발표했다. 시기별로 간략하게 구분해보면 2006~10년에는 개발 로드맵(Roadmap to Development), 2012~16년에는 구현 청사진(Implementation Blueprint), 2017~25년에는 비전 2025(Vision 2025)를 발표하면서 발전 방향을 정교화했다.

 

최근 중국 정부의 합류는 기존의 BIMP-EAGA 핵심 협력국이었던 일본과 호주로 하여금 동 지역에 대한 투자와 경제적 지원을 늘리도록 자극하면서 경쟁적 역동성(competitive dynamic)을 조성하고 있다. 중국은 2009전략적 개발 파트너(strategic development partner)’BIMP-EAGA와 협력 프레임워크(framework of cooperation)에 서명했으나, 10년 동안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아세안과 더 포괄적이고 다층적인 관계 맺기를 희망하는 중국은 201811BIMP-EAGA와 첫 장관급 회의를 개최하고, 서로 간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했다. 1년 후 개최된 제2차 장관급 회의에서는 2009년 협력 프레임워크에서 확인된 우선순위 영역 외에도, 디지털 경제와 빈곤 완화가 새로운 협력 분야로 추가됐다.

 

다양한 협력국의 참여와 경쟁이 BIMP-EAGA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외부적 자극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BIMP-EAGA 개발의 새로운 동력이 될 내부적 변화로 인도네시아의 수도 이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부 칼리만탄(Kalimantan)주의 펜아잠 파세르 우타라(Penajam Paser Utara) 지역 일부와 쿠타이 카르타느가라(Kutai Kartanegara) 지역 일부를 신수도 후보지로 선정하고 2024년까지 정부의 핵심 시설을 옮길 계획을 수립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이전은 BIMP-EAGA의 지축을 흔들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수도 이전은 BIMP-EAGA의 고질적 문제인 연결성(connectivity)에 큰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인접 지역 간 경제적 상호보완 관계를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경제적 교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서로 자원을 교환할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BIMP-EAGA를 구성하는 지역이 모두 낙후되었고, 연결성 문제로 이동과 물류에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경제적 효과와 시장 기회 측면에서 수도 이전은 국경 너머 인접한 지역에 낙수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보르네오의 언론 매체인 보르네오 포스트(Borneo Post)’는 인도네시아 수도 이전을 거의 찾아오지 않는(hardly ever comes by)’ 지역 발전을 위한 드문 기회(rare opportunity)’라고 묘사하고 있다. 동남아 최대 인구와 시장을 가진 인도네시아의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BIMP-EAGA가 아세안의 낙후된 소지역에서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도 실현 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신수도 이름을 누산타라(Nusantara)’라고 명명했는데, 누산타라는 말레이어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부르나이, 필리핀을 모두 포함하는 군도(archipelago)’라는 뜻이다. 해양부 동남아의 중심이 되기를 꿈꾸는 인도네시아의 신수도 이름이 이웃 국가에는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BIMP-EAGA 발전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